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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벗으면 다시 또 잘려나간 발가락 하나

기사입력 2023.01.14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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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광석 이갸기 산책.png

     

    사진 11.jpg

    (소록도에 있는 한하운 시비)

     

    [고광석 이야기산책]1945815일 해방을 맞이한 뒤에 이북 지역에는 소련군이 진주하였다. 소련 군정이 시행되면서 함흥의 지주였던 한하운의 집안은 재산을 몰수당하고 빈민의 처지로 전락했다. 그때부터 한하운의 남동생은 김일성 정권을 타도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집 창고에 무기와 탄약을 숨겨 두었다. 한하운의 끈질긴 만류를 뿌리치고 동지들과 함께 거사를 실행하려던 한하운의 동생은 194743일 보안대원들에게 연행되었다. 한하운도 체포되어 두 달 넘게 유치장에 갇혀 있었다. 한하운은 잘 먹지 못한 데다가 날마다 취조를 받고 고문을 당해 나병이 재발하였다.

     

    한하운은 죽을 위험을 무릅쓰고 38선을 넘어가 대구, 부산 등지로 돌아다니며 치료약을 구한 다음 겨울에 다시 북으로 돌아온다.

     

    그는 동생의 행방을 찾아 고향으로 가는 도중에 허가를 받지 않고 이남에 갔다 왔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원산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48년 여름 한하운은 목숨을 걸고 형무소를 탈출하였다. 한 달간 맨발로 걸어 38선 너머 한탄강에 도착하였지만 이남 땅에는 한하운을 반갑게 맞아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다시는 이북 땅을 밟지 못하였다. 한하운이 자유를 찾아 떠난 길은 결국 가족과 영영 이별하는 길이 되고 말았다.

     

    한하운은 사랑하는 가족이 없는 남한 땅을 떠돌다가 소록도로 가면서 쓴 시 <전라도 길>에서 당시 모습을 잘 그려내고 있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 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 삼거리를 지나도

    쑤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 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어졌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 리, 먼 전라도 길

     

    - 한하운, <전라도길>

     

    소록도는 나병 환자를 집단으로 수용하고 치료하는 시설이 있는 곳이다. 한하운은 천안을 지나 전라도의 끝인 소록도로 가고 있다. 황톳길을 걸어가다가 나무 밑에서 쉬며 신발을 벗으면 어느 틈엔가 다시 또 잘려나간 발가락 하나……. 이제 남은 발가락은 두 개밖에 없다. 발가락이 하나씩 떨어져 나가는 발로 가도 가도 천 리, 먼 전라도 길을 걸어갈 때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한하운은 19495월에 <전라도 길>을 비롯한 시 25편을 묶어 첫 시집 한하운 시초를 발간하였다.

     

    한하운의 시는 많은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지만 남쪽 문단에서 그의 활동은 순탄하지 않았다. 나병 증세는 이미 얼굴에까지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어 문인들은 그를 마주치기만 하면 외면했고, 작품을 들고 잡지사에 찾아가면 원고를 만지는 것조차 꺼렸다. 그래도 한하운은 인간의 존엄을 스스로 증명해 보이는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1955년과 1957년에 각각 시집 보리피리, 자서전 나의 슬픈 반생기를 출간하였다. 또한 나환자 정착촌인 성계원을 설립하여 자치회장으로 활동하면서 나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위한 사회사업에도 힘썼다. 1960년엔 나병이 음성이라는 판정을 받으면서 더욱 활발히 사회활동을 하였는데, 1968년 나병을 치료하기 위한 투약으로 간경화 증세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어머니 병들어 죽으실 때 날 두고 가신 길을 슬퍼하셨다라고 노래했던 시인 한하운은 1975228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현재 그의 시비는 전라남도 고흥군 도양면 소록도에 세워져 있다. 소록도는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 이 사람들 가운데서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마태복음 2540,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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