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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

기사입력 2023.01.14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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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광석 이갸기 산책.png

     

    [고광석 이야기 산책] 꽃은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

     

    꽃은 진종일 비에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

    빗방울 무게도 가누기 힘들어

    출렁 허리가 휘는 꽃의 오후

    꽃은 하루 종일 비에 젖어도

    빛깔은 지워지지 않는다

    빗물에 연보라 여린 빛이

    창백하게 흘러내릴 듯 순한 얼굴

    꽃은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

    꽃은 젖어도 빛깔은 지워지지 않는다

    - 도종환, <라일락 꽃>

     

    세상을 살다보면 자신의 삶이 초라하게 여겨질 때가 있다. 온갖 어려움을 당하여 삶의 무게가 버겁게 느껴질 때도 있다. 가끔은 여태껏 살아온 모습을 벗어나서 다른 존재로 거듭나기를 바랄 때도 있다. 그런 순간에 꽃은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는 시인의 말은 적잖은 위로가 된다. 못나고 부족한 면이 있더라도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존중하고 사랑하라고 다독여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꽃은 젖어도 빛깔은 지워지지 않는다는 말을 들으면 왠지 지금껏 살아온 나의 삶을 소중하게 여겨야겠다는 마음이 든다.

     

    20094월 도종환 시인이 온종일 비가 내리는 날에 거리를 걸어가는데 어디서 달콤한 향기가 번져왔다. 주위를 둘러보니 골목 끝에 라일락 꽃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시인은 라일락 꽃 옆을 서성이다가 꽃은 진종일 비에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라는 꽃의 말을 들었다. 라일락 꽃은 여린 연보라색이라 비에 젖으면 금방 지워질 것 같은데도 제 빛깔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도종환은 내일 또 비에 젖어도, 내년에 다시 비에 젖어도 제 빛깔 제 향기를 잃지 않으리란 생각이 들어서 <라일락 꽃>이란 시를 쓰게 되었다고 한다.

     

    제대한 후 도종환이 복직한 곳은 충청북도 청원군 부용면에 있는 부강중학교였다. 그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을 때 첫아기가 태어났다. 이듬해 봄에 그의 아내가 토혈했다. 병원에서는 십이지장궤양이니 크게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가을에 또 토혈했다. 의사는 피가 고였다 넘어오는 것 같으니까 수술하자고 했다. 수술하면 뱃속의 아이를 지워야 하므로 약물치료를 선택했다. 겨울을 지내고 무사히 딸아이를 낳았다. 겨우 몸을 추스른 뒤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암인 것 같다며 서울로 가보라고 권했다. 서울의 원자력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보았더니 암에 걸려서 길어야 여섯 달 아니면 한두 달밖에 살지 못할 수도 있다고 했다. 도종환은 차마 입에서 말이 떨어지지 않아 아내에게 병명을 알려주지 못하고 자꾸 미루기만 했다.

     

    암에 걸렸다는 말을 더 미룰 수 없게 된 날, 어떤 방식으로 말을 해주어야 할지 고민하며 밤을 새우다시피 하였다. 옥수수 잎에 빗방울이 투두둑 떨어지는 밤이었다. 아침에 시내버스를 타고 학교로 출근하는데, 시골집 담벼락에 줄지어 핀 하얀 접시꽃이 눈에 들어왔다. 몸에서 피가 계속 빠져나가 창백해져 있는 아내의 얼굴과 접시꽃이 겹쳐 보였다. 빈 도서실로 올라가 아내에게 해줄 말을 종이에 쓰기 시작했다.

     

    보다 큰 아픔을 껴안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엔 언제나 많은데

    나 하나 육신의 절망과 질병으로 쓰러져야 하는 것이

    가슴 아픈 일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콩댐한 장판같이 바래어가는 노랑꽃 핀 얼굴 보며

    이것이 차마 입에 떠올릴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마지막 성한 몸뚱어리 어느 곳 있다면

    그것조차 끼워 넣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에게

    뿌듯이 주고 갑시다

    기꺼이 살의 어느 부분도 떼어주고 가는 삶을

    나도 살다가 가고 싶습니다

    - 도종환, <접시꽃 당신>

     

    병상에서 이 시를 읽어주며 도종환 시인은 울었지만 아내는 울지 않았다. 그의 아내는 자기가 죽거든 눈을 다른 이에게 기증해 달라고 말했다. 그는 견우직녀가 한 해 한 번 만나는 칠석날, 서른두 살의 동갑내기 아내를 옥수수밭 옆에 묻었다. 도종환의 아내는 생전에 병상에 누워 그동안 당신의 뒷모습만 보면서, 그 뒷모습을 용서하면서 살았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 아내가 말한 당신의 뒷모습은 아침이면 학교로 가는 뒷모습, 돌아오면 책상에 앉아 있는 뒷모습, 시를 쓴다는 이유로, 공부한다는 이유로 그냥 지켜보아야 하는 뒷모습이었다. 도종환의 산문집 사람은 누구나 꽃이다에는 우리가 배우자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배우자에게 처음보다 나아지고 흥미로운 나를 선물하는 것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제임스 홀리스가 했다는 그 말을 되새겨 볼 때마다 접시꽃 당신을 향한 그의 애절한 마음이 느껴져 가슴이 짜릿하다.

     

    도종환은 두 번째 시집 접시꽃 당신을 펴낸 1986년부터 문화운동 단체와 교육운동 단체를 만드는 일을 시작했다. 그는 1986124일에 결성한 충북문화운동연합의 공동의장을 맡았다.

     

    1986115일 새벽, 어느 여중생이 유서를 써 놓고 세상을 떠났다.

     

    1등 같은 것은 싫은데

    앉아서 공부만 하는 그런 학생은 싫은데

    난 꿈이 따로 있는데,

    난 친구가 필요한데

     

    난 인간인데

    난 친구를 좋아할 수도 있고

    헤어짐에 울 수도 있는 사람인데

    모순, 모순, 모순이다

    경쟁! 경쟁! 공부 공부

    순수한 공부를 위해서 하는 공부가 아닌

    멋들어진 사각모를 위해

    잘나지도 않은 졸업장이라는 쪽지 하나 타서

    고개 들고 다니려고 하는 공부

     

    공부만 해서 행복한 건 아니잖아!

    공부만 한다고 잘난 것도 아니잖아!

    무엇이든지 최선을 다해 이 사회에 봉사하고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면 그것이 보람 있고 행복한 거잖아

    꼭 돈 벌고 명예가 많은 것이 행복한 게 아니잖아

    나만 그렇게 살면 뭘 해

     

    난 로보트도 아니고 인형도 아니고

    돌멩이처럼 감정이 없는 물건도 아니다

    밟히다 밟히다, 내 소중한 삶의 인생관이나

    가치관까지 밟혀 버릴 땐

    난 그 이상 참지 못하고 이렇게 떤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

     

    청주대 무용학과 강혜숙 교수는 우리춤연구회와 함께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무용극을 만들었다. 당시 옥천군에 있는 동이중학교에 근무하던 도종환은 대본을 쓰는 일에 참여했다. 무용극을 공연할 때 조명을 끈 상태에서 배우가 낭독하는 여중생 O양의 유서는 많은 이들을 울렸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는 그해 겨울부터 전국 20개 도시에서 80회 이상 순회공연을 하였다. 1989년에는 배우 이미연과 김보성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도종환은 1994년에 여섯 번째 시집 사람의 마을에 꽃이 진다를 출간했다. 그 시집에 실려 있는 시 중의 하나가 <흔들리며 피는 꽃>이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 도종환, <흔들리며 피는 꽃>

     

    꽃은 바람에 흔들리고 비에 젖는 존재이다. 꽃이 바람에 흔들리거나 비에 젖는 일은 고난을 겪는 것이다. 그런데 고난이나 시련을 거치지 않으면 무엇 하나 훌륭한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대나무가 휘어지지 않고 똑바로 자랄 수 있는 것은 줄기의 중간 중간을 끊어주는 시련이라는 마디가 있기 때문이다. 바람에 흔들리고 비에 젖으며 피었기에 꽃은 더욱 아름답고 빛나는 존재로 거듭날 수 있다.

     

    시련이나 고난으로 힘들어하는 이들에게 시인은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다며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네고 있다. ‘빛나는 꽃들도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다며 견디기 어려운 고통으로 힘겨워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있다. 시인의 말처럼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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