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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롭고 높고 쓸쓸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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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외롭고 높고 쓸쓸한

-백석을 존경한 제자가 만든 노래 ‘스승의 은혜’
-“1,000억이 백석의 시 한 줄만 못해”

고광석 이갸기 산책.png

 

사진 10.jpg

 

[고광석의 이야기산책] 외롭고 높고 쓸쓸한

 

김수환 추기경은 생전에 무소유를 읽은 뒤 아무리 무소유를 말해도 이 책만큼은 소유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무소유의 저자 법정 스님은 2010311일 서울 성북동 길상사에서 입적했다. 길상사는 최고급 요정 대원각이 있던 자리에 세운 절이다.

 

무소유를 읽고 법정 스님에게 1,000억 원대의 땅과 건물을 기증한 대원각 주인 김영한은 191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할머니와 홀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했다. 김영한은 개화사상을 지닌 어머니 덕분에 중학교까지 마칠 수 있었지만 당시에 불어닥친 광산 바람이 그녀의 행복을 앗아가 버렸다. 금광사업을 하는 할머니의 친척이 자금을 마련하려고 그녀의 집 재산을 몰래 빼돌리는 바람에 집안이 망해버린 것이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자 김영한은 바느질로 가족의 생계를 꾸려가는 어머니의 부담을 덜어주려고 열여섯 살에 결혼을 한다. 그녀는 결혼한 지 채 6개월도 안 되어 남편이 우물에 빠져 자살한 뒤 모진 시집살이를 견딜 수 없어 친정으로 돌아온다.

 

김영한은 가난한 살림에 보탬이 되고자 열여섯 나이로 조선의 권번(일제 강점기에, 기생들의 조합을 이르던 말)에 들어가 기생이 된다. 조선 권번의 설립자인 금하 하일규는 희망하는 소녀들을 따로 모아서 가무를 가르쳤다. 그녀는 하일규에게 가곡, 궁중 가무를 배운다. 노래와 춤 솜씨가 뛰어났던 김영한은 파인 김동환이 발행하는 잡지 삼천리에 수필을 발표하며 문학 기생으로 주목받았다.

 

김영한은 기생 생활을 할 때 신문지에 한글을 반복해서 쓰며 글씨 연습도 하고 시조를 외우기도 했다. 그런 행동이 소문이 나자 조선어학회 회원들이 일부러 찾아와서 글씨 쓰는 모습을 관심 있게 지켜보기도 하였다. 그중에 해관 신윤국이 그녀를 가상히 여겨 1935년에 일본 유학을 주선한다. 김영한은 신윤국의 후원으로 도쿄에서 공부하다가 조선어학회 회원들이 구속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한다. 그녀는 신윤국이 수감되어 있는 함경남도 홍원의 형무소로 면회를 갔다. 그러나 면회할 수 없다는 말을 듣고 낙담한 그녀는 함흥에 머물러 살게 된다.

 

김영한은 어떻게 해서라도 면회할 기회를 잡기 위해 고심하다가 함흥 권번으로 들어간다. 기생이 되면 큰 연회에 참석한 함흥 법조계의 유력 인사를 만나서 특별 면회를 부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하지만 일제는 신윤국이 민족주의자라는 이유로 면회를 일절 허락하지 않는다.

 

그 무렵에 김영한은 함흥 영생고보(영생고등보통학교) 교사들 회식 장소에 나갔다가 영어교사로 근무하고 있던 백석과 만난다. 두 사람은 처음 보는 순간부터 서로에게 깊이 빠져들었다. 어느 날 백석은 김영한이 사들고 온 당시선집(唐詩選集)을 뒤적이다가 이백의 시 <자야오가>를 발견하고 그녀에게 자야라는 아호를 지어준다. 김영한은 백석이 지어준 자야라는 이름을 그 무엇보다도 진귀하고 소중한 선물로 여겼다.

 

백석은 19364월에 조선일보를 사직하고 함경남도 함흥 영생고보의 영어교사가 되었다. 영생고보의 학생들은 선생으로 부임한 백석이 지나갈 때마다 그 모습을 보려고 야단이었다. 영생고보 제7회 졸업생 김희모는 백석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억하고 있다.

백석을 처음 본 순간은 영원히 잊지 못할 장면이었다. 백석 선생의 모습은 우리에게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당시에 유행하는 모던보이의 모습으로 최고의 멋쟁이 그대로였다. 그의 옷차림은 두 줄의 단추가 가지런히 달린 당시 최첨단의 산뜻한 감색 더블이었다. 넥타이도 옆으로 비낀 줄무늬였고, 머리는 뒤로 넘긴 올백형으로 한 폭의 그림 같은 모습이었다.”

 

시인 백석은 왜 독특한 헤어스타일을 고집했던 것일까? 왜 비싼 양복을 입으면서 월급의 상당 부분을 외모를 꾸미는 데 지출했을까? 그것은 바로 개인적으로 멋을 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민족의 정체성과 위상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거만한 인상을 줄 수 있는 백석 특유의 올백형 헤어스타일은 일본에서 유학하던 시절에 시작되었다. 청산학원에서 백석은 다른 여러 과목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하지만 일본어는 잘 알면서도 사용하지 않으려고 했으며 고고한 헤어스타일로 상대를 압도하려고 했다. 그 외모에는 일본에 대한 굽힘 없는 정신이 담겨 있는 것이다. 백석은 양복을 입고 멋을 내어 일본을 능가할 멋과 지성이 조선에도 있다는 것을 표현하려고 했다. 그는 의복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지만, 다른 곳에는 돈을 아끼며 검소하게 생활했다.

 

백석을 존경한 제자가 만든 노래 스승의 은혜

하늘 향해 두 팔 벌린 나무들같이로 시작하는 <어린이 노래>는 시인이며 아동문학가인 강소천이 작사한 곡이다. 강소천은 영생고보를 다닐 때 스승을 더 보고 싶어 졸업을 미룰 정도로 백석을 흠모하였다. 백석은 노래하듯이 높이고 낮추는 방식으로 시 낭독을 하였다. 강소천은 백석의 시 낭송에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시를 음악으로 만드는 작업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강소천은 백석 시인에게 영어와 문학의 깊이를 배웠으며, 백석의 모든 시를 줄줄 외울 만큼 백석을 존경하고 사랑했다. 백석 또한 강소천을 각별히 아끼고 사랑했다. 백석의 지도와 격려로 강소천은 시와 소설, 동시와 동요 들을 짓게 되었다. 강소천은 동시와 동요를 지으면서 스승 백석의 말을 평생 마음에 새겼다.

그 나라 말을 오래 보존하는 길은 오직 한 가지, 그 나라 문학을 높은 수준에 올리는 것이다. 또 하나 우리 나라말을 후세에 이어 가게 하는 방법은 좋은 아동문학 작품을 남기는 길이다.”

 

강소천은 1941년에 동시집 호박꽃 초롱을 펴냈는데, 백석의 시집 사슴과 마찬가지로 동시 33편을 수록하였다. 그는 청진 제일고급중학교 등에서 교편생활을 하다가 한국전쟁 때 월남하였다. 강소천은 1963년에 사망할 때까지 북에 있는 스승을 늘 그리워했지만 남북 분단으로 백석이라는 이름조차 언급할 수 없는 현실을 가슴 아파했다. 그래서 그는 종종 자신이 만드는 동요에 백석의 시를 넣어서 아이들에게 들려주었다.

 

백석을 존경하고 사랑한 제자로서 강소천은 스승의 은혜를 노래로 만들었다.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우러러볼수록 높아만 가네

참 되거라 바르거라 가르쳐 주신

스승은 마음의 어버이시다

아아 고마워라 스승의 사랑

아아 보답하리 스승의 은혜

 

“1,000억이 백석의 시 한 줄만 못해

198710월에 백석의 시를 오래전부터 남달리 아끼고 사랑해온 이동순이 백석 시 전집을 펴냈다. 백석의 시 전집이 발간되었다는 신문기사를 본 김영한은 이동순에게 전화를 한다. 이동순을 만난 김영한은 20대 초반, 어여쁘던 처녀 시절에 함경도 함흥에서 시인 백석과 만나 뜨거운 사랑에 빠지게 되었고, 이후 서울 청진동의 작은 집에서 혼례를 치르지 않은 부부로서 산 적이 있다고 말했다. 김영한은 이동순의 권유로 1995년에 내 사랑 백석을 출간하였다.

 

김영한은 1955년에 서울 성북동의 배밭골을 사들여 대원각을 짓고 한식당으로 운영하다가 요정으로 개조했다. 대원각은 삼청각, 청운각과 더불어 1960~70년대 밀실 정치가 펼쳐진 국내 3대 요정 중 하나였다. 최고급 요정 대원각은 유명 정치인들과 일본 총리들도 드나들던 곳이었다.

 

김영한은 무소유를 읽고 크게 감명 받아 1987년 미국에 체류할 당시 로스앤젤레스에 들른 법정 스님에게 대원각을 시주하겠으니 절로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그녀는 1995년 땅이 7천 평, 건물이 40동으로 시가 1,000억 원대에 해당하는 대원각을 법정 스님에게 맡겼다. 드디어 19961214일 길상사가 개원하였다. 길상사의 개원 법회가 열리던 날, 김수환 추기경도 직접 법정 스님을 찾아와서 축하해 주었다.

 

1933년 일본에서 유학할 때 백석의 거주지는 동경의 길상사 1875번지였다. 백석의 하숙집이었던 길상사를 기억하고 있던 김영한은 대원각을 법정 스님에게 기증하면서 이름을 길상사로 짓게 된다. 19991114일 세상을 떠난 그녀의 유골은 유언대로 첫눈 내리는 날 길상사 경내에 뿌려졌다.

 

백석을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으로 간직하며 살던 김영한은 1997년 창작과 비평사에 2억 원을 기부하여 백석문학상을 제정한다. 죽기 열흘 전 자야 김영한은 그 사람 어디가 그렇게 좋았어요?”라는 기자의 질문에 “1,000억이 그 사람의 시 한 줄만 못해라고 대답했다. 생전에 김영한은 백석의 생일인 71일이 되면 하루 동안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 사랑하는 연인 백석에 대한 그리움과 미안함을 그렇게라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노년의 자야는 백석의 시를 조용히 읽는 게 생의 가장 큰 기쁨이었다. 자야가 죽는 순간까지 그리워했던 백석은 외롭고 높고 쓸쓸한 삶을 살다가 199617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게 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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